심곡서원

발자국찍기/서원 2010. 5. 31. 21:18 posted by 맑은눈동자
민가나 별서를 제외하고 궁궐이나 왕릉, 사찰 및 서원등은 조영시 일정한 특징과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성리학적 규범이 엄격히 적용된 서원은 전학후묘냐 전묘후학이냐 혹은 전당후재냐 전재후당이냐 하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배치도는 모두 비슷하기에 집에서 가까운 용인의 심곡서원을 찾기로 결정.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 희생을 당한 정암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창건과 동시에 심수경 등의 상소로 '심곡'이라는 사액을 받은 곳입니다.
용인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곳에 조광조를 배향하기 위한 서원건립의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인근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를 제향한 충렬서원에 임시로 배향되었다가 묘소 아래로 서원이 건립되면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고 하네요.

심곡서원(深谷書院)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12
-규모: 주요 7동
-주향자: 조광조(1482~1519)
-조성연대: 건립 및 사액 :효종 1년(1650)

대부분의 서원의 입지가 그렇듯이 심곡서원 역시 평지가 아닌 구릉지에 입지하여 지형적 위계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외삼문을 열어놓고 강당에 앉아 전면을 바라보면 아래쪽에 탁트인 들판이 보였을거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단지 상상으로 그칠뿐 현실은 다릅니다. 오히려 이곳을 찾은 후 크게 세가지 이유로 실망을 하였는데 밑에 천천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홍살문으로부터 외삼문앞에 이르러 사진을 찍었습니다. 솟을삼대문이 있으며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오른쪽문의 반만 개방해 놓았습니다. 약1시간정도 여기저기 자세히 둘러보았는데 그동안 방문하는 사람은 5명남짓되었습니다.

동재와 서재.
홍광표선생의 한국의 전통조경에서는 『조선 후기에 강학적 기능보다 제향적 기능이 더욱 강조되면서 재실의 의미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서원과 달리 재실공간이 생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되어있으나 실제 답사해보니 동재, 서재가 모두 존재하였습니다. 새로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면 홍광표선생이 틀린 것이고, 홍광표선생의 설명이 맞다면 잘못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재의 동쪽으로 있는 저 나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아시는 분 답 좀 부탁합니다.

외삼문을 들어서서 정면으로 보이는 일소당. 강당입니다.
심곡서원은 서원의 대부분의 형태인 전당후묘, 전재후당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면이 벽체로 막혀있고 전후좌우로 판문을 둔 건물로 온돌방이 없이 온통 마루로 되어있어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른 특이한 건축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 궁금한 점은 예전 우리전통조경에서는 잔디가 능침말고는 쓰이지 않았는데 강학공간에 잔디는 어떤이유일까요?

일소당을 왼쪽으로 돌아 내삼문이 보입니다. 사당을 둘러싼 담장의 아랫부분은 장대석을 기초로 하여 과거의 이 서원이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담장 하단에 배수용 석루조는 서원에서 흔치 않은 점경물입니다.

심곡서원의 현판은 사액을 내려준 효종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합니다.

사당내부의 모습입니다. 일요일에 방문해서 개방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님 평상시에도 개방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다행히 옆쪽에 담이 낮아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소당의 초석은 자연석인데에 비해 사당은 다듬돌로 초석을 두었습니다.

일소당의 자연석 초석

강당 뒤 남쪽에는 장서각을, 북쪽으로는 고직사를 두고 있습니다.

사당 뒷편의 모습입니다.  전통조경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경사지를 단으로 처리하였으나 제향공간이므로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지는 않았습니다. 단위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서 있습니다. 그 주위로 풀들이 많이 자라났는데 좀 정리를 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 하단에 우수의 배수로가 있습니다.
이러한 배수로를 통하여 우수는 결국 사원 남쪽의 방지로 흘러 들어옵니다.

전형적 방지원도가 있는데 자연석으로 쌓은 호안은 최근에 처리하였다 합니다. 끊임없이 계류가 유입되고 배수되지 않은 고요있는 방지이다 보니 깨끗한 느낌이 들지는 않더군요.

방지 동쪽으로 수령 5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와 한 그루의 향나무가 있어 휴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심곡서원을 둘러보면서 느낀 실망감 세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1. 주차장과 서원의 입지성등 주위환경
관리상의 한계겠지만 홍살문과 외삼문 사이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홍살문은 그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일요일이라 근처의 교회에 왔던 사람들의 주차로 인해 주차장은 매우 혼잡했습니다. 비워놓느니 지역주민의 편의를 위해 주차장을 개방하는 것은 좋은 취지이겠지만 홍살문을 넘으면서부터 서원에 진입했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복잡한 것보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좀 더 어울렸을겁니다.

문화재를 현대사회에서로부터 분리하여 문화재만을 즐길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서원이 아파트숲에 둘러쌓여버렸습니다. 옛 선인들이 즐겼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판이하게 틀려져 버렸으며 어느 곳 하나 정심의 장은 없어보였습니다.

#2. 문화재 관리소홀.
전날 창덕궁 후원을 관람한 후 이곳에 답사를 했기에 비교가 되서인지 심곡서원의 외형은 서원이란 곳을 처음 방문했던 저에게는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원래 심곡서원이 여타의 유명한 서원에 비해 작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규모의 크고작음 뿐만 아니라 현재 관리가 잘 되고 있느냐 아니냐는 점이지요.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놓여져있는 집기류등이 눈에 띄였고 전체적으로 보수가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3. 관리자의 관리소홀.
2번의 언급이 문화재청 제도하에서의 예산 및 관리상 문제라면 3번은 심곡서원내 관리자의 관리문제입니다. 위 사진은 사당뒷편 한 구석을 촬영한 것입니다.
 어이없게도 상추등의 채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거기 푯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더군요.
『농작물을 주인 허락없이 뜯어가는 일을 하지 마시요. 입장바꿔 생각해봐.』
이 푯말의 내용, 반말의 어투등으로 미루어보아 하루이틀 채소를 키운게 아닌거라는 느낌입니다. 그간 얼마나 방문객이나 주위 주민들이 무단채취해갔으면 저런 문구를 써놨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은 사유지가 아니고 문화재 지역임을 다름아닌 문화재관리자가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원은 성리학적 규범이 엄격히 적용된 곳입니다. 심곡서원은 특히 중종재위시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를 주향한 곳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큰 곳입니다.
작은 곳에서나마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여서 추후에 방문하는 사람에게나마 제가 느꼈던 불편한 점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향교 및 서원에는 은행나무나 느티나무 노거수가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는데 선현을 모시는 제향 공간과 교육을 행하는 강학 공간이 공존했던 향교 및 서원에는 각각 공간의 성격에 합당한 수목을 심어온 것으로 보인다. 향교 및 서원은 진입공간, 강학공간, 제향공간, 지원공간, 담장 외부/기타 공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향교 및 서원은 각 공간마다 주어진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는데 식재되어진 수목도 종류가 다를 것으로 보인다.

수목의 상징
 수종(학명) 상징성 비고 
 은행나무 공자의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장소  경주, 춘천, 전주, 나주, 영광, 하양향교, 소수, 도동, 덕천, 필암서원에 14주 보호수지정 
 느티나무  위엄, 신성한 장소  과천, 홍천, 괴산, 공주, 청양, 해미양교, 회연, 우저, 자운서원에 12주 보호수 지정
 회화나무  삼공(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선비나무, 학자수, 벼슬
 영천향교, 고부향교, 서악서원
 배롱나무  청결, 고요, 떠나간 벗을 그리워 함  강릉, 고부, 단성향교, 묵계, 금오, 덕천, 병산, 옥동, 도동, 남계, 돈암서원
 매화나무  선비의 곧은 지조, 寒士, 군자  병산서원, 회연서원
 살구나무  등용  영월향교, 청계서원
 밤나무  신목  영춘향교, 진주향교, 자운서원
 향나무  신계, 신과 인가의 매개체, 벽사  진주, 하양, 함양, 경주, 여주, 원주, 춘천, 영월, 청주, 밀양향교, 도산, 옥산, 덕봉, 돈암, 고산, 회연, 대로, 자운, 신항서원
 소나무  곧은 절개와 지조, 민족의 기상  청주, 경주, 상주, 밀양, 경주, 과천, 영월향교, 고산, 예림, 청계, 흥암, 돈암, 소수, 병산, 묵계, 고산, 덕봉서원
 측백나무  불로장생, 성인의 기를 받은 신선의 나무  수원향교, 광주향교, 남계서원

서원의 진입·과정 공간에는 소나무가 54.5%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향교보다 서원에 많이 건립된 문루가 휴게공간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소나무가 상징하는 '곧은 절개와 지조'는 향교보다 서원이 선비 정신을 더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교의 강학공간에는 은행나무가 28주(49%)로 나타났고, 서원의 강학공간에는 매와나무가 6주(86%)로 나타났다.
향교의 제향공간을 살펴보면 향나무가 많이 나타났고 서원의 제향공간에는 배롱나무가 많이 나타났는데 개화기간이 100일 정도로 길고 '떠나간 벗(님)을 그리워 한다'는 꽃말과 같이 후손들이 선인을 기리며 심어 온 것으로 보인다.
배식유형을 살펴보면 향교와 서원의 진입공간에는 은행나무가 독립수로 식재된 것이 식재된 것이 많은 데 유교공간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식재된 것으로 보인다. 향교의 강학공간과 ㅗ제향공간에 식재된 은행나무는 대칭식재된 것이 많은데 엄숙하고 장엄한 미를 표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식재된 것으로 보인다.
공간구성체계
서원의 정문을 겸하는 누각의 경우 대개 누하진입이 이뤄지는데 특히 병사서원이나 도동서원의 경우 강학공간과의 지형적 차이로 누각에 진입할 때 누문을 통해 강학공간의 중심에 해당하는 강당이 서서히 가시됨으로서 공간의 심연성과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강학공간은 중앙의 강당과 강당 전면의 좌우에 배치된 양제로 구성되는데 강당은 양제에 비해 높은 단 위에 위치하여 공간의 위계성과 중심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강당은 대개 좌우에 온돌방이 위치하고 중앙에 대청이 형성되어 강당 뒤의 창호를 개방할 때 자연스럽게 과정적 공간상의 누각을 통해 서원의 내부와 외부가 시각적으로 관류되는 연속성을 보인다.
제향공간은 주로 사당과 제사청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강학공간 후면의 구릉지 위에 배치되어 위계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속공간은 주로 고사나 창고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대개 강학공간의 측면에 형성되어 서원의 관리운영을 담당하는 공간이다. 이와 같이 서원의 공간은 기능에 따라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 단위공간은 상호유기적인 공간구조를 통해 중심성과 위계성을 나타내고 있다.

1. 공간구성체계는 기능에 따라 제향공간, 강학공간, 과정적 공간, 부속공간으로 공간의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저후고의 지형적 특성을 근간으로 하여 주축을 중식으로 좌우대칭적 공간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각 단위공간은 상호유기적인 공간적 연계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계단이나 단차를 이용한 계층적 질서를 통해 중심성과 위계성을 보이고 있었다.

2. 공간형식은 중심성의 변화에 따라 강당중심형 - 사당중심형의 변화과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는 가운데 시대별 지역별로 일련의 변화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있었다.
1) 강당중심형은 형성기에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출현하다가 확산기에 들어 타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거쳐 쇠퇴기 이후 정착되는 변화과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당과 사당이 병립하는 형태는 과도기에 출현하고 있는데 강당중심형의 변형으로 공간의 중심이 사당으로 전이되는 과도기적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2) 사당중심형은 형성기에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출현하여 발전기에 들어 본격적인 발전을 보이다가 쇠퇴기에 영남지방으로 확산되는 변화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서원은 정치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공간형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시대별 지역별로 일련의 변화과정을 통해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관학인 중앙의 성균관 및 사부학당과 지방의 군현에 소재하는 향교가 있으며 사학으로는 지방의 수려한 자연경관 속에 위치하는 서당이나 정사, 서원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이중 서원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강학과 선현의 향사라는 기능을 갖고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기구로서 조선시대 정치, 사회, 교육, 문화 등의 전 분양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서원은 제향과 강학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중심대상이 공자를 비롯한 성현이 아닌 선현이라는 점, 설립의 주체가 국가가 아닌 사림이라는 점, 그리고 설립의 동기와 배경에서 관학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의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서원에 사액을 내린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와 교화사업을 조정이 공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서원 성립 초기에 서원의 입지는 주로 산수가 아름답고 읍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계곡이나 배산임수의 경사지에 위치하게 된다. 숙종조 이후에는 선현, 선사와 문중에서 선조를 봉안하기 위해 선현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마을 인근에 사현 위주로 조영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붕당정치와 당쟁이 격화되고 가문의 권위를 높이고 양반신분의 유지를 위해 서원을 건립하고 문중의 인물을 향사하면서 서원과 사우의 제향인물에 구별이 없어지고 서원의 일차적인 기능인 장수와 강학보다는 사현의 기능이 더 강조되어 사우와 큰 차이가 없게 되어 사우로 불러야 할 것도 서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원의 입지적 특성
서원은 일반적으로 산수가 뛰어나고 조용한 산기슭이나 계곡 또는 향촌에 마련되어 있으며 성격에 따라 절터 또는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는 경우, 선현의 연고지에 건립되는 경우, 서원에 배향된 선현들이 살았을 때 세운 서당이 발전하여 이룩된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성균관이나 향교가 조정의 직접적인 관여를 받았던 반면에 서원은 사학으로서 행정상으로 조정과 상당히 독립되어 있었고 또한 서원 제도 자체에 함유된 유가적 은둔사상 등이 결탁되어 행정의 중심지로부터 격리되어 설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의 공간구성 - 장수와 유식
퇴계에 의하여 정립된 강학 위주의 본래 서원의 공간구성은 기본적으로 선현의 향사를 위한 사묘가 필수적이고 또 학문을 강론하는 강당이 있어야 하고 학생들을 수용하는 재사 외에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나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고직사, 서책을 보관하는 창고류 등의 여러건물이 요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서원의 개념을 말할 때는 장수(藏修)와 유식(遊息)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된다. 장수는 마음을 집중해서 학문에 힘쓴다는 뜻이고 유식은 즐기면서 편안히 쉰다는 말이다.
1)장수의 기능으로서 존현강도(尊賢講道)
서원은 주로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전저후고의 경사면에 터를 잡으며 건물 배치는 사당이 서원 영역 뒤에 강당이 그 앞에 그리고 동·서 재사가 강당 앞에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향공간과 강당 및 재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학공간은 둘레 담을 조성하여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고 각 건물 상호간의 위계가 분명하여지며 건축배치상의 축이 뚜렷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전체적인 배치의 특징은 명확한 직선 축과 좌우 대칭의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묘는 절제되고 정숙한 형태를 이루고 강당은 대칭 구조 속에 높은 격식을 갖추며 재사는 소박하고 간소한 외관을 이루어 전체 건물간에 뚜렷한 위계질서를 조성한다. 그리고 각 구성건물들은 중심축을 살리고 좌우대칭을 이루는 명확한 규범 아래 통제된 넋이다.
2) 성리학적 학문관과 유식
장수는 학문을 닦는 과정이며 유식은 학문을 닦는 과정에서 집중된 정신과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으로 재해석된다. 단순히 경젠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성정까지 닦고 기르는 공부가 시위를 팽팽히 당기는 장수하는 과정이라면 시위를 풀어내는 것은 유식하는 과정인데 이 도한 성정을 닦고 기르는 과정으로 포함된다.
정신과 성정을 풀어내고 기르는 유식의 공간은 서원의 주변 절승이 될 수도 있고 서원마당 안의 연못을 비롯한 조경시설이 될 수도 있으며 자연경관을 건축화 시키는 누각 공간이 될 수도 있다.

서원의 외부공간과 조경
1) 서원 외부공간의 특성
사당영역이 정적이고 한정적인데 반해 강당영역은 다소 개방적이고 동적인 특성을 보인다는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2) 성리학적 자연관과 서원조경
앞서 얘기했듯 서원은 장수와 유식의 공간개념으로 파악하는데 이 때 유식공간은 조경공간을 구성하는 지당, 수목, 자연경물, 자연경관 등에 의해 형성된다.
지당은 대부분의 서원에 나타나지는 않고 남계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심곡서원, 죽림사 등에만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지당의 주류가 방지원도가 주류임에 반하여 방지뿐만 아니라 원형[각주:1]과 타원형[각주:2]도 나타나며 연못안에는 섬이 있는 것[각주:3]도, 없는 것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서원에 지당을 조성함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집수지로서의 기능도 갖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르는 대상물로서의 역할이 강하다.
도산서당의 연지를 정우당이라 명명함은 주렴계의 애련설을 염두에 두고 연꽃과 같이 고아한 인품으로 청빈하게 생활하려고 함이었을 것이다.
3) 서원에 식재된 수목
서원에 식재된 수목은 매우 한정적으로 우선 행단과 관련된 은행나무 식재를 들 수 있다. 소수서원, 도동서원, 필암서원, 자운서원, 덕천서원, 신안서원 등에는 외삼문 밖이나 강당 영역 안에 은행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남계서원에는 매화, 대나무, 연꽃이,
퇴계가 조성한 화서암 정원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오이가 심어졌고
계당서원에서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 연꽃을 심어 자신을 포함하여 육우원을 만들었다.
또한 도산서당에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라 명명하고 있다.
소수서원에는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한 다음해 죽계 건너편에 송백과 대나무를 심어 취한대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식재사실만으로 식재의도를 살펴본다면 대부분 지조와 곧은 절개, 고매함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4) 서원조경속의 자연경물
산이나 물, 바위 등의 자연물은 조영자에 의하여 명명됨에 서원이라는 소우주의 영역에 포함되고 궁극적으로는 조영자의 사상과 철학이 내재된 성리학적 자연의 일부로 승화된다.
도산서당의 천연대와 천광운영대, 반타석, 탁영담
그리고 사산오대로 대표되는 옥산서원의 자연암반에 명명된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세심대
소수서원의 '敬'자의 각자와 취한대의 명명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성리학적 수양론,ㅡ 심성론, 출처관의 나타내는 성리학적 자연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 퇴계의 한서암 [본문으로]
  2. 죽림사, 타원형의 두개의 연지 [본문으로]
  3. 병산서원 광영지와 죽림사의 타원형 연지중 한 곳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