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삼국유사에 단군이 태백산 산상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는 개국설화가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단군조선의 노을왕이 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유는 새와 짐승을 놓아기르는 동산으로 조경행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원전 590년 전후 의양왕시대에는 후원에 청류각을 세워 왕이 군신과 더불어 큰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이 대동사강에 보인다.
기원전 180년대인 제세왕 10년에는 동지로부터 수일 지난 뒤 궁안에 도리가 만발했다는 기사가 있다.

[백제]
삼국 중에서 가장 조경문화가 발달한 곳은 백제이다. 백제인의 예술적 소질은 뛰어나 한때는 조형예술 면에서 고구려, 신라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일본의 아스카시대 문화에 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따. 일본서기에 의하면 612년 백제귀화인 노자공이 남정에 수미산과 오교를 만들었다고 한 사실을 보더라도 이에 못지 않은 정원사(庭苑師)가 백제에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진사왕시대의 궁원은 자연 풍경지에 못을 파고 가산을 쌓아올려 진기한 꽃을 심는 외에 동물을 놓아 키웠으나 동성왕의 궁원에서는 화려한 누각, 정사가 비치되고 무왕의 궁원에 이르러서는 20여리나 되는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올려 연못 안에 신선도를 만들고 못가에 버드나무를 심어 왕족은 용두의 배를 띄워 놀았다고 한다.
궁남지의 방장선산은 불로장생을 희원했던 신선사상에 입각한 작정수법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초기의 단순한 풍경식 정원에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차차로 상징적, 또 종교적 색채를 띄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는 북방에서 중국의 침입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여 백제와 신라가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문화를 배타적 태도로 받아들여 한반도의 고대문화를 이룩하는데 선구자적 역학을 하였다.
동사강목에서 고구려 초기에 궁원을 맡아보는 관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궁원 조경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추측케 한다.
또한 양원왕2년(546) 2월초에 왕도의 배나무가 서로 가지가 이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구려 때 평양에는 배꽃이 가득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신라는 가장 일찍 건국하였으나 4세기 초에 가서야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조경 문화도 백제나 고구려보다 늦게 싹트지만 5세기 중엽 불교가 공인 받게 됨에 따라 여러 유명 사찰이 차례차례 지어졌다. 특히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 앞의 구품연지는 타원형의 인공지로서 여기에 누각, 석탑,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등의 그림자가 비쳐지게 하여 종교적 감동을 주기 위한 영지(影池)로서의 기능과 극락정토의 불교의 이상향을 표현하며 성(聖)과 속(俗)을 구분 짓는 경계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조형과 더불어 불교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통도사에는 구룡지가 있는데, 창건 당시에는 배를 띄울 정도로 큰 연지였었다고 하나, 현재는 4~5평의 타원형 못으로 아담하게 돌다리를 가로질러 놓았다.

[통일신라]
통일후 조경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임해전지원을 들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2월에 궁궐에 못을 파고 가산을 쌓고, 꽃을 심고, 진기한 조수를 놓아 길렀다고 한다. 지원은 대체로 방형이며 동서 약 180m. 남북 200m로 면적은 4ha에 가까운 광대한 규모이다. 무산십이봉과 3개의 섬으로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축조한 것을 시사한다.

[고려시대]
고려는 왕도를 개경에 두었는데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 왕도의 건설에 있어서 한국의 지리 풍수에 맞는 배산임수하는 양택이론이 정립되게 되었다.
문학, 예술면에서는 번영을 거듭하여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위시해서 고려청자와 같은 조형예술의 극치를 이룬 경지에 도달한 것과 함께 조경에 있어서도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특히 18대 의종시대에는 고려의 정원문화가 꽃 피웠던 때이다. 왕족이나 권신의 사저에도 정원이 만들어지는 한편 은퇴한 고관이나 문인묵객이 강호의 한촌과 산간의 명승을 찾아 산장, 별서를 꾸미고 거기에 문자 그대로 자연식 조경을 구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화원은 고려시대 정원의 특징 중의 하나인데 관상목적의 화목과 화훼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의 일종인데 민가의 화훼를 옮겨 심고 부족한 것은 당나라 상인에게서 사서 채웠을 정도로 왕들은 화원을 꾸미는데 적극적이었다.
고려조경에서 특필할 만한 것은 그 기록속에 거의 화훼가 빠지는 일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화훼류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종류로는 모란을 비롯하여 작약, 석류화, 두견화, 연화, 국화 등 청초한 것보다 화려한 것이 즐겨 심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송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인해 중국 원산종의 조경식물이 많이 들어오게 되어 이른바 도입식재가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서울에 조영된 궁궐의 공간 체계 성립에 있어서는 음양오행사상과 풍수도참설이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궐 배치에 있어서는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고 앞에 관청을 두는 좌조우사면조의 원리에 따라 궁궐이 이루어졌으며 삼문삼조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창덕궁, 창경궁으로 대표되는 동·서축의 배치형식은 대비를 지칭하는 '동조'라는 관념을 근간으로 서쪽에 왕의 정전을 두고, 동쪽에 대비의 동전을 두는 관계로 발전되어 궁궐 내부의 공간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규법이 되었다.[각주:1]
궁궐내 조경적 대상이 되는 것은 경회루지원과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원, 자경전 꽃담, 향원정 지원 등이 남아 있다.
경회루는 조선초기부터 외국사신의 영접이나 군신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왕이 친히 입석하는 과거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경회루 지원은 약 130×100m 크기의 방지와 3개의 방도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제일 큰 섬에 樓 건물이 세워지고 있으며, 이 섬에 돌 난간이 있는 세개의 석교로 연결되어 있다. 경회루에서의 공식적인 행사는 경비면에서 이상적이라 할 수 있으며 서쪽과 북쪽에 걸쳐 ①인왕산과 북한산을 들러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②아래쪽의 지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또한 ③방지 주변을 산책함으로서 기품 있는 건축물과 함께 두 개의 방형성에 심겨진 ④적송군이 수면에 투영된 모습도 쾌감을 더해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와비의 침전이 교태전 후원으로 축조된 아미산원은 왕비의 산책과 관상을 목적으로 꾸몄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이용하여 평지상에 인공적으로 축조한 동서 약 55m, 남북 약 30m의 넓이에 높이 약 3m에 4단의 화계를 조성하고 각 단에 석지, 괴석, 장식성의 굴뚝, 그리고 매화, 모란, 양두, 배꽃, 반송, 철쭉 등의 화훼와 수목을 배치하여 아름답게 꾸밈으로서 선계로서의 아미산을 상징한 것으로 보여진다.
자경전은 벽돌로 쌓은 꽃담에 모란, 매화, 복숭아, 석류, 국화등의 화훼와 해, 산, 구름, 바다, 소나무, 불로초, 거북, 사슴, 학등의 십장생 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아미산에서와 같이 화원을 꾸밀 수 없는 공간에 이를 대신하여 담장을 아름답게 꾸며 감상하려는 데서 나온 발상으로 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효의 상징이기도 하다.
조선조 3대 태종이 이궁으로 조성한 창덕궁은 그 동북쪽이 약 6만평에 이르는 후원을 자연구릉지에 왕가의 휴식과 유락을 위해 수경한 원림이다.
이 후원을 원림 공간의 특징에 따라 부용지 공간, 애련지 공간, 반도지 공간, 옥류천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부용지공간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영화당, 사정기비각, 회향각, 희우정, 제월광풍각 등의 건물이 들어선 지역으로 후원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원이다. 부용지는 세로 34.5m. 가로 28.4m의 방지로 못 가운데 소나무가 식재된 둥근 섬이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고 하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용정이 두 개의 기둥을 물 속에 담구고 서 있고 서쪽 못가에 사정기비각이, 동쪽에는 춘당대라고 명명한 단위에 영화당이, 북쪽에는 5단의 화계위에 주합루가 세워져 있다. 주합루는 왕의 개인도서관으로 조촐한 연회장으로도ㅗ 사용되었다.
부용지를 왼편으로 감씨고 북쪽으로 돌아가면 불로문이 나타나고 그 바로 곁에 있는 방지가 애련지이며 그 북안에 단칸짜리 애련정이 세워져 있다. 못의 크기는 동서 약 30m, 남북 약 26m에 이르며 북쪽 언덕은 낙엽수림으로 덮여 있따. 부용정과 같이 두 기둥을 물속에 담그고 있는 애련정은 수림을 배경으로, 수면에 투영되는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애련지를 나와 북쪽으로 구릉 밑을 돌아가면 좌측에 자연곡선형의 반월지가 나타난다. 반월지는 존덕정이 있는 상지와 부채모양의 관람정이 있는 하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두 개의 방지로 이루어진 것이 동궐도에 확인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소요정 앞에 만든 곡수거와 인공폭포, 그리고 그 안쪽에 있는 방지중의 청의정이다. 소요암 바위에는 '옥류천'이라고 인조임금이 쓴 글씨를 새겨놓았고, 숙종의 시를 새겨놓았다. 옥류천 지역은 궁원 내에서 가장 멀리 있으면서 주변이 깊숙하고 조용한 공간이 자연의 계류에 약간의 인공만을 가하여 조성한 별서정원의 맛을 느끼게 한다.
낙선재 후원은 4단의 계단식 화계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후원을 화계로 조성하여 각 단에 화목과 점경물을 배치하는 것은 북고남저의 지형에 건물을 세울 때 집 뒤편에 생기는 경사지를 안주인의 생활공간에 알맞도록 장식하고자 한데있으며 좁은 공간이지만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함으로서 시각적 관상효과도 높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집안에서 외출할 기회가 적은 여인들이 막힌 공간에서 뒷문을 나와 정자 위에 오르면 주변의 지붕들은 물론 저 멀리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어 답답함을 떨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름철 시원한 바람을 쏘일 수 있는 절호의 공간으로 한국 정원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취라 할 수 있따.
이와같이 창덕궁 후원은 변화 있는 자연지형을 못과 저자를 적절히 배치하고 수목이나 키가 낮은 관목, 그리고 지피식물들을 모두 주변 경관에 한데 어우러지게 식재하고, 또 구릉지는 화계를 두어 여기에 키가 낮은 관목과 화초를 심기도 하였다. 특히 수목은 계절의 변화를 잘 드러내는 활엽수 계통의 나무를 주로 심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를 잘 드러내는 활엽수 계통의 식재는 사철이 뚜렷한 기후와 그것이 자연과 조화되려고 하는 한국 전통 정원의 원리를 지키고자 한 선조들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창덕궁 후원은 단순히 휴식과 유락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색과 명상을 통한 수신과 독서 와 친시를 통하여 정사에 몰두할 수 있는 지혜를 축적하고 기력을 회복시켜주는 치유공간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
한국 전통 궁궐 조경은 농경생활과 더불어 시작된 수목의 실용적 이용에서 꽃이나 열매의 미적 체험을 통한 수목 이식 행위나 자연숭배사상에 의해 숲이나 나무의 신성한 구역으로의 신림등을 조성한 행위에서 그 시작을 찾아도 좋다.
사상과 문화의 전래와 함께 불로장수를 희구하는 신선사상으로 요약되는 경관을 묘사하기에 이르게 되어 방지와 원도로 대표되는 궁원의 독특한 원림조성과 후원양식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정원, 자연경관에 모입한 별서조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따. 끝으로 궁궐정원으로 대표되는 한국전통조경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생각은 자연을 생명의 원천으로 보아 지세를 존중하려는 풍수사상, 자연을 벗으로 삼아 시름을 잊고자 하는 신선사상,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천일합일사상 등이 내재되어 자연스러움, 자유분방성, 단순성 등의 조영의식으로 전환되어 정원구성요소와 기법면에서 '형상과 물성의 조화', '정신성의 형태화' 즉 관계성의 조화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한국전통정원은 눈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자연을 제공함으로서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더 큰 가치가 있다.
  1. 동·서축의 배치형식을 갖는 유형은 정전, 편전, 침전의 중심공간을 이루는 전각 구성에서 덕수궁을 제외한 3개의 궁궐들이 공통적으로 두 개의 편전에 해당하는 전각들을 가지고 있으며, 진입방식이 남쪽에서 북쪽이 아닌 동쪽에서 서쪽이거나, 서쪽에서 동쪽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창경궁을 제외하고는 정전이 대부분 서쪽에 위치하고 침전이 동쪽에 위치한다. [본문으로]

어휘상 화계에 있어서 '섬돌 계'는 오르내리는 돌층계를 의미한 것으로 계단상의 구조를 일컫으며 보석(步石), 석계, 석단, 석제(石梯) 등과 같이 돌층계의 형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화계란 계단의 형태로 몇개의 층을 이루는 화단을 이르는 것 으로 말할 수 있다. 화계의 정원용어에 관하여 윤국병씨는 고려시대 후기의 목은집에 화계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어서 그 시대에 이미 화계가 꾸며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중기에 축조된 청평사 복희암지 후면의 축석을 예로 들어 조선시대의 화계와 동일시하고 있다. 또한 윤씨는 화계와 구조적으로 닮은 정원시설인 화오에 대하여 꽃을 심기 위해 마련한 둔덕으로서 화단과 같이 보아 화계와는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
화계에 대하여 돈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 높지막한 평지를 의미하는 돈대로서는 화계 각단마다의 지반을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화계가 일반적으로 몇개의 층을 겹쳐서 형성되는 구조에 견주어 볼 때, 화계자체에 대한 그 의미가 적확하게 전달되는 용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화계의 발생
한국은 전체적인 지형에 있어서 고저기복의 차가 적은 준평원의 소구릉지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약75%정도가 산지로 되어있다. 이러한 지형조건은 풍수지리사상으로 대표되는 사상적인 배경과 함께 결과적으로 자연지세를 중요시하여 배산득수의 양지를 주거지로 선정하였다. 즉 택지에서의 명당은 구릉남사면에 위치하여 산을 배경으로 하고 남쪽을 향하여 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지세를 이상향으로 한 것이다. 이는 택지의 선정에 관하여 쾌적한 생활을 위한 극히 소박하고 실질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풍수지리사상에 기저를 둔 택지입지가 한국주거·정원구성의 기본적 요인의 하나로 정착한 것은 한국독자의 지형 지세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취락의 대부분이 산지에 둘러싸여 남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강을 바라보는 형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화계 또한 그 발생의 원점을 구릉지 남사면 원지형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풍수지리사상에 기인한 택지의 입지는 자연히 부지와 건축물배치의 관계에 유형적인 기준을 만들게 되어 한국의 주거와 정원구성의 기본적인 요인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후정의 사면을 계단상의 화계로 처리한 독자적인 공간의 처리기법은 한국적인 정원에 있어서 특히 후정의 특징을 대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화계의 입면적 특징
1) 치조
화계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지형의 형태와 택지에 크게 영향을 받지만 전옥(殿屋)의 격식에 대응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다시말해서 격식이 높은 전옥에 대응하는 화계일수록 화계의 각단을 구성하는 장대석의 수를 많이 중첩하여 쌓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전옥의 기단을 구성하는 장대석 단의 수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그 장대석 개개의 높이도 보다 높은 것이 사용되고 있다.
2)연조
교태전은 자연지형의 경사면을 이용한 화계가 아니라 경회루의 연못을 파낸 흙으로 인공적으로 축조된 화계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태전 후정의 화계는 3단을 이루며 이곳에는 다양한 식생과 첨경물을 도입하여 경관을 구성하게 된다.
대조전 후정의 화계는 4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연구릉이 건축물지에 근접한 지형의 경사지를 화계로 처리한 것이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의 후정에서 보는 화계는 지형상 서고동저의 형태를 갖는 동일구릉의 사면을 화계로 처리한 예이다. 석복헌의 화계는 연와담으로 낙선재와의 공간을 구분하고 있지만 동일한 구릉을 화계로 처리한 경우이다. 특히 낙선재와 석복헌의 경우 화계의 높이에 있어서 동일 패턴을 유지하고 있으나 너비에 있어서는 낙선재의 화계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구릉의 서쪽에 비하여 표고가 낮은 동쪽의 수강재 후정의 화계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의 화계와 거의 같은 수치의 높이와 너비를 유지하고 있다. 통명전 후정의 화계는 4단으로, 경춘전 후정의 화계는 3단으로 구릉처리하여 구성하였다.
3) 후원
후원에서 볼 수 있는 화계는 주합루, 선향재, 부용정등이 있는데 주합루는 구룡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건물의 전정과 후정에 각각 화계가 조성되어 있는 특이한 궁원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후정의 화계는 5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계의 높이는 상단으로 갈수록 점차 작은 수치를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수평면의 너비를 강조한 안정적인 화계의 구조로서 이해할 수 있으며 넓은 너비의 평면적인 구성은 주합루 중층에서의 조망을 고려한 화계의 구조로 볼 수 있다.
주합루 전정의 화계는 4단의 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각 단마다에는 부용지 측에서 어수문을 거쳐 주합루에 오르는 주동선으로서의 계단이 축조되어 있다. 전정에 화계가 조성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며, 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풍수지리사상에 의거한 택지의 결과이지만 주합루는 전면에 펼쳐진 낮은 지형의 부용지공간으로 이어지는 경사지를 화계로서 처리한 예이다.
선향재의 후정에 조성된 화계는 4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단에는 농수정이 세워져 있다. 화계는 각 단의 높이에 있어서 상단으로 갈수록 그 치수가 커지고 있어서 불안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용정에서 보는 화계는 그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로서 정자의 후측 산록에 소규모로 구성되어있으며 현재 3단째에 괴석이 석함과 함께 높여져 있다. 화계의 구성은 2단으로 되어있다.
4)종묘
종묘는 제사공간으로서 단순명쾌한 공간구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화계의 구성에 있어서도 배후의 지형이 그다지 높지 않은 지형상의 조건도 있겠지만 극도로 절제된 단순한 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정전(正殿)과 영녕전의 후정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화계의 경사에 대하여
넓고 평탄한 공간이 필요한 치조에서는 후면의 구릉지에 근접하여 육박하는 형태로 공간확보의 방법을 취했을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화계의 너비를 충분히 취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화계의 구성에 있어서 높이의 입면이 평면에 비하여 강조된 구조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덕궁의 통명전과 양화전의 화게는 높이와 너비가 공히 타에 비하여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어서 지형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화게의 입면적인 요소가 후정경관에서 크게 강조되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하겠다.

결론
화계는 한국전통정원의 후정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서 나타나는 한국의 독자적인 정원양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화계가 몇개인가 단을 이루어 경사면을 극복하는 형태는 나름대로의 자연을 존중하며, 그 환경에 순응·조화된 결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한국정원의 독특한 공간구성의 특징이기도 하다.
치조는 높이 및 너비에 있어서 전체평균치에 비하여 작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화계의 너비를 충분히 취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화계의 구성에 있어서 높이의 입면이 평면에 비하여 강조된 구조를 갖는다.
연조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전체평균치를 상회하고 있다. 특히 교태전의 화계는 전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갖는 화계로서 평면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온화한 분위기의 후정을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원의 화계의 높이는 전체평균치와 거의 같지만 너비에 있어서 평균치를 넘는 수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너비를 넓게 확보하므로서 구조적으로 안정된 느낌의 화계가 조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종묘는 높이와 너비에 있어서 평균치에 못 미치지만 가장 완만한 구배를 이루어 안정감을 나타내는 구조를 보인다.
장대석에 의해서 축조된 화계의 각 단을 보면 각단의 너비는 단의 높이에 비하여 비교적 좁게 되어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게 구성된 화계는 극히 입면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흡사 벽과 같은 인상을 주게된다. 이것에 대하여 각 단의 높이가 보다 더 낮게 억제되어 각각 단의 너비가 증가하는 화계에 있어서는 화계 전체가 보다 평면적으로 되어 벽과 같은 인상이 엷어지게 된다. 이곳에는 종종 화려한 식재가 행하여져 화계 전체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견 화계가 일반의 정원에 있어서 화단에 비유되는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