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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발자국찍기/사찰 2010. 5. 24. 01:13 posted by 맑은눈동자
일요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식구들이 용주사에 간다고 해서 따라나섰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가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기회가 있을때 적극적으로 답사를 다니지 않으면 원하는 곳을 다 다닐 수가 없기때문에 책과 사진기를 들고 화성으로 향했습니다.

용주사(龍珠寺)
-소재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188
-규모: 약13,500㎡(4,000여평)
-조영자: 정조(1752-1800)
-조성연대: 정조 14년(1790)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의 원찰입니다. 신라시대 창건된 갈양사의 옛 터로서 고려시대 고려왕조의 원찰로 삼게되었다가 조선시대 용주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용주사를 창건한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고쳐지었으며 그 후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합니다.
원래 정조는 불교를 탄압하고자 했는데 우연히 장흥 보림사의 보경스님을 만나고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바치자 그것을 읽고 마음에 느끼는 바가 커서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하도록 합니다. 정조는 부모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도록 하여 용주사가 효의 본찰이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현재 외삼문 왼쪽 박물관에 전시되어있음)

용주사는 주산인 성황산(표고134m) 밑의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황산의 산줄기가 비교적 뚜렷해 좌청룡, 우백호를 이루는 중심부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가 현륭원의 능사를 건립하고자 장소를 물색할 때, 당시의 신하들이 갈양사의 옛 터가 천하제일의 복지라고 하여 왕이 이 곳에 능사를 창건하고 절 이름을 용주사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용주사와 능사의 주인인 장헌세자의 능침과는 약800m정도 거리로 용주사의 입지선정과정에서 능찰과의 지리적 상관성이 크게 고려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는 창건이후 지금껏 사찰의 구조 및 공간구성의 형식이 크게 바뀌지 않은 까닭에 능사로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으며 창건과정이나 창건당시의 기록들이 잘 남아있습니다. 이 기록들로 미루어 용주사 창건불사는 국왕의 뜻에 의하여 국가적 공사로 이루어졌고 그 비용도 중앙 및 지방의 관가로부터 충당했으며 설계와 공사도 불교계의 인력뿐 아니라 관가의 인력까지 모두 동원된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건축과 공간구성양식이 궁실 및 관아의 것과 유사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창건 당시 대웅보전 9칸, 선당 39칸, 승당 39칸, 천보루 15칸, 칠성각 6칸, 향로전 12칸, 제작 6칸, 좌우종루 4칸, 외삼문 3칸, 좌우익랑 3칸, 동문 9칸, 춘가 2칸, 우물 두 곳 등 도합 140여 칸으로 되어있었는데 현재도 커다란 변화없이 당시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어서 조선후기 원찰의 면모를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는 전체공간을 네 단으로 분할 하고 있는데 
첫번째 단: 외삼문과 행각이 있는 곳
두번째 단: 천보루와 선당인 나유타료 및 승당인 만수리실이 있는 곳
세번째 단: 대웅보전과 노전이 있는 곳
네번째 단: 칠성각과 장판각, 지장전이 있는 곳으로 구성됩니다.

이렇게 네 단으로 나누어진 비교적 평탄한 지형의 남북일직선 축선상에 외삼문과 천보루 그리고 대웅보전을 정연하게 배치하고 대웅보전 앞 단 중정의 좌측과 우측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동측에는 ㅁ자 현태의 선당을 그리고 서측에는 같은 형태의 승당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으며 이 선당과 승당을 천보루와 행각으로 연결하여 중심영역 전체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용주사의 일주문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일주(一柱)가 아니라 삼주(三柱)입니다. 이것도 원찰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인 생각일 뿐. 
   
고려 이후 조선시대의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신앙형태는 3단 신앙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중 일주문은 중단신앙에 해당합니다. 중단신앙에는 옹호신중각들이 위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옹호신들에 의하여 도량 내의 모든 악귀가 물러난 청정도량이라는 신성관념을 갖게 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전이영역의 공간입니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매표소가 있고 매표소로부터 홍살문까지 사진처럼 구부러져 있어 일직선의 축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답사당시는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안지나 등이 쭉 걸려 있지만 평상시에는 주변 점경물이나 조경요소가 더 눈에 띄리라 생각됩니다.


박물관쪽에서 바라본 용주사의 외삼문입니다. 솟대라던지 오리, 돌탑등의 조경요소가 눈에 띕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외삼문입니다. 외삼문에 연결된 줄행랑이 동서로 연결된 선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육상궁과 같은 별묘의 삼문형태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용주사가 원찰로 조영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양쪽으로 괴석(?)들이 나열되어있고 그위에 불자나 방문객들이 작은 돌을 올려놓으며 자신의 소망을 빌은 흔적이 보입니다.

외삼문에 다달아 우측으로 작은 정방형의 돌을 볼 수 있는데 하마석으로 생각됩니다.

외삼문 앞에는 작은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일반 사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구성요소로서 주로 궁궐의 정문 앞에서 볼 수 있지요.

아울러 금연이라고 써있는 비석도 외삼문 양옆 구석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창건당시 세워놓은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현대에 '금연'이라는 경고를 주변분위기에 맞춰 만들어놓은 것일까요?

삼문을 지나 사찰의 경내로 들어서면 전면에 5층석탑뒤로 대규모의 누각인 천보루가 일직선 축선상에 나타납니다.

천보루는 여섯 개의 목조기둥 아래 높다란 초석이 받치고 있는 건축양식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는 이 초석은 오히려 석조기둥으로 보여질 만큼 장중한 모습입니다.

누의 2층은 3면을 난간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지붕위에는 용두도 보입니다.
이같이 4각으로 반듯하게 다듬은 장초석과 지붕위의 용두등은 조선시대 사찰건축에서는 보기 어려운 요소로 관아건축의 취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각 건물은 일반사찰의 누각과 비슷해서 사찰건축과 관아건축의 모습이 절충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을 통해 용주사가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구월건축양식을 도입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보루는 첫째 단과 둘째 단을 연결할 수 있도록 2층의 누하진입양식을 갖추고 있으며(누하진입C형) 누의 동서측에는 나유타로와 만수리실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위: 나유타료/ 아래:만수리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 있고 또한 퇴마루가 부속되어 있습니다. 외정 쪽의 방들이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들 건물의 구조는 민가의 건축양식과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한편 누와 마주보며 위치하고 있는 대웅보전은 셋째 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용주사의 주불전이며 공간구조적으로 볼 때도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입니다. 대웅보전이 있는 셋째 단은 중정과의 사이에 장대석을 쌓아 공간을 조성하고 중앙에 대우석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사찰에는 대우석에 연화문이나 당초문을 넣어 장식하는데비해,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 비운, 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용주사의 주인인 장헌세자의 능침인 융릉에 세워진 정자각의 것과 동일한 양식입니다. 이걸로 보아 현륭원과 용주사가 거의 같은 시기에 동일한 장인에 의해서 조영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진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용주사는 기단과 초석을 방형과 원형의 이중초석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사찰이 잡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쓰고 있는 점과는 크게 대비될 뿐더러 이중초석은 관청건축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되었음을 볼 때, 용주사가 왕실의 후원 아래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대웅보전앞 계단부분의 조경적 요소입니다. 바로 위사진의 작은 비석에는 천연기념물이라는 표지가 되어있는데 회양목이라고 기억합니다만, 회양목이 기단위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홍광표교수님의 한국의 전통조경 책에서의 용주사 평면도를 보면 대웅보전의 좌우측에 지장전이 있다고 나오는데 실제로 가본 결과 왼쪽에는 천불전,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었습니다.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며 지장보살은 지옥중생들을 구제하기를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라 하지요. 이에 비해 천불전은 '천개의 불상을 모신 사찰 전각'이라는 의미이며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삼신불 삼세불·천불·삼천불 등 다불() 사상의 영향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4단에 천불전 위로 칠성각이 있습니다. 현재 시방칠등각으로 이름이 바뀌어진 상태라고 합니다.

시방칠등각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평면도에서는 3층석탑이라고 표기된 곳이 보입니다. 명칭은
'전강영신대종사사리탑'입니다. 전강 영신선사(1898~1975)의 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생각되는데 앞쪽의 해태 두마리는 키치적인 요소가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한국의 전통조경 책의 평면도에 3층석탑이 흡사 지장전 뒷편에 있는 것처럼 표시되었으나 실제로는 호성전 뒷편으로 보입니다.

호성전입니다. 축성전이라고도 불린다고 하지요. 앞쪽에 부모은중경탑이 있어 용주사의 창건의미를 한층 돋아주는 곳입니다.

나오는 길에 5층석탑 좌측에 있는 불음각을 찍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이곳은 일반인 출입구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한컷 겨우 찍었지요. 외부인들이 이곳으로 발걸음조차 하지 않더라구요.ㅎㅎ

5층석탑과 불음각사이에 '용주사 범종'이 있습니다.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거종(巨鐘)으로 국보120호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