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배산임수에 터를 잡았으며 이에 따라 산수가 결합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졌다. 따라서 조경도 자연히 자연과 조화되고 천지의 이치와 합일된 자연풍경적 조경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전통조경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조화되도록 하는데 있다. 따라서 지형을 함부로 변형시키지 않고, , , 나무의 형상도 자연의 법칙을 이용할 뿐 인공적 힘을 가하지 않았다. 또 직간보다 사간으로 자라는 나무나 자연스러운 배식을 좋아하였고 자연의 고유형상을 되도록 수용하여 집터나 정원에 끌어들였다. 자연히 주거지와 구조물들의 자연성이 살아 숨쉬게 되고 자연을 닮아가게 되었다.

우리와 중국, 일본의 조경문화 공통점은 자연환경에 대한 사고의 유사성과 자기의 영역에 울타리를 두르고 자신만의 소우주를 조성했다는 점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을 활용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경관조성에 입지의 선택과 처리 그리고 주변 환경, 즉 차경의 수법을 이용한 것이다.

 

II. 전통조경에서 차경의 의미

17세기에 저술된 택리지 복거총론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전통마을이나 주택에 적합한 장소로 자연지세에 따라 바닷가나 강가보다는 계류가가 좋고 살만한 장소를 선택할 경우도 지리, 생리, 인심과 산수가 있으면 더욱 좋은 복거지로 생각하였다. 양택의 입지로도 주산을 갖고 그 앞에 너른 들판이 있으며 그 주위를 산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면 풍수지리가 의미하는 장풍득수되는 곳을 으뜸으로 삼아 차경의 요소가 많은 지역을 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조물의 입지를 정하는 것을 원야에서는 원림 조성의 특징은 바로 지형의 특성에 다라 알맞게 조성하되 그 배치를 융통성있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강조하였다. 계성의 원림조영이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주자의 흥조행위에 관한 이론, 즉 인지론과 차경론으로 요약된다. 인지는 부지 환경에 대한 내용으로 이것은 오늘날의 환경설계의 국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차경은 원림안팎의 경관에 대한 내용으로 이것은 오늘날 경관설계의 국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인지가 공간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하고 있는 개념이라면, 차경에서는 공간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요소까지 중시되고 있다. 그러나 인지와 차경은 별개의 독립된 개념이 아니며 두 가지 요소의 조화와 통일이 바로 흥조인 것이다. 이것은 원림을 흥조함에는 환경설계와 경관설계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며 공간성과 시간성을 모두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의미의 차원까지도 포괄하여야 함을 뜻하며 기술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추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흥조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원림에 대해 계성은 비록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자연이라 할지라도 그 형식과 내용은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담는다고 하였다.

인지는 환경친화적이고 생태적인 계획, 설계방식이다. 인지는 환경에 대해 어떠한 변형이나 개조를 적극적으로 가하는 행위이기보다는 환경적 조건이나 질서를 따르면서 그 특성을 원림의 일부가 되도록 최소한의 변화를 가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인지의 방법으로는 첫째 입지유형에 따른 고려, 둘째 기존의 지형지세 이용, 셋째, 차경도 동시에 고려, 넷째 물과 수목처럼 기존에 있던 환경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 다섯째 환경조건에 따른 구조물의 형식과 위치 결정 등을 들 수 있다.

차경은 경관을 단순히 빌려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원림안팎의 경관을 활용하는 개념이다. 차경은 경관의 깊이와 폭을 크게 함으로서 공간감을 확대하고 결과적으로 이용자들이 원림 속에서 얻게 되는 경험과 느낌을 풍부하게 한다. 즉 유한함속에서 무한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기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차경의 대상은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시각적인 것까지도 포괄하는 통감적이며 공간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시사철의 변화와 같은 시간적인 상황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아울러 차경에는 사회 경제적인 원인 또한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공간만 있고 시간의 개념이 배제된 차경이라면 완전한 차경이 아닌 것이다.

차경이란 원림의 조성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원림을 조성함에는 일정한 격식이 없지만 외부경관을 차용함에 있어서는 일정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차경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사계절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라고 하였다. 또 차경의 종류로는 원차, 인차, 앙차, 부차, 잉시이차가 있다.

 

III. 입지로 본 차경

우리나라는 시각적인 면으로 산이 가장 중요한 경관적 요소이다. 산악숭배사상, 서물사상의 성립, 산수에 대한 문화, 산수체계에 따른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또한 지형적으로 산은 경관의 주요 요소가 되었으며, 건물이 입지하고 정면성을 갖추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균형잡힌 삶을 영위하기 위한 장소의 마련에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 도시-자연 조화와 함몰된 속에 자연적으로 차경을 도입

주례고공기의 좌묘우사, 전조후시 원칙에 따라 정궁인 경복궁은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안산을 목멱산, 우백호를 인왕산, 좌청룡을 낙산으로 하고 청계천을 명당수로 하여 입지하였으며 정궁의 좌측에 종요 그리고 우측에 사직단을 두었다.

배산임수하고 전조후침의 배치형태로서 침전조나 후원에서는 차경할 수 있는 조건을 자연스럽게 갖출 수 있었다.

경복궁의 경회루는 처마선이 뒷 주산과 조화되게 건축되었고 연지에 비춰지는 주변 자연의 반영 모습도 하나의 차경으로 볼 수 있다. 교태전은 주산의 흐름을 나타내도록 아미산인 가산을 만들었고 화계에 식재공간을 조성하여 각 단에는 꽃전과 함께 왕과 신하, 행복과 장수, 사군자의 선비적 고고함등을 상징하였다. 또한 석지의 표면에는 함월지와 낙하담이라고 음각되어 시간의 변화에 따른 자연에 대한 마음의 흥취까지도 표현된 차경이라 할 수 있다.

 

2. -허의 개념으로 높은 곳에 입지하여 투시성을 연출

루는 건축구조적으로 2층으로 되어있으며 루마루 밑으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거나 또는 마루가 지면으로부터 높이 솟아 있는 구조를 갖추어 있다. 루의 기본이 되는 경관처리기법의 개념은 ''의 개념이다.

병산서원을 위시한 유교 건축들은 폐쇄적이며 인위적이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경관구조는 역전된다. 병산서원 내부에서 바라보면 외부의 자연 경관은 앞의 건물들과 중첩되면서 일체화된 경관으로 등장한다. 만대루는 외부에서는 안을 감싸고 막아서는 담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밖으로 시원스럽게 뚫려있는 창으로 차경의 기법으로 공간에 외부적으로 투시성을 살렸다고 할 수 있다. 또 만대루에 올라서면 7칸의 기둥의 틀을 통해 병풍과 같은 자연경관을 살필 수 있다.

 

3. 정자 - 허의 개념으로 백리형국에 입지

정자는 높은 곳 위에 세워진 집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마루를 높인 것이 아니라 높은 곳 위에 세운 집이기에 공간이 개방되어있고 허창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정자를 이용할 때에도 차경의 기법을 이용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정자를 자연환경에 하나의 인공적인 경관의 대상으로 볼 때 그 정자가 놓여짐으로서 관찰자가 보는 관경과 그 정장에서 보여지는 것인 경관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정자의 위치는 모든 경관을 한 점에 모은 취경의 지점에 위치하며 따라서 그 곳에 오르면 멀리 있는 경관까지도 다 볼 수 있는 원경의 저점에 위치한다. 많은 정자는 그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곳이 하나의 승경처가 되어, 인간이 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경 속에 인간이 함께 하는 자연에 몰입되는 속에서 객관적인 관찰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인간 자신을 하나의 소우주로 생각하고 인간 자신 주변도 하나의 소우주로 생각하여 그 곳에서 인간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행태를 팔경으로 표출하고 있다. 일예로 대관령 동쪽에 있다고 전해오는 관동팔경 중에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은 그 자체로 루와 정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주변의 경관이나 인간의 삶의 모습까지도 간직하고 있는 팔경을 갖고 있다.

 

IV.다양한 차경효과를 얻는 시설물들

1. 별서-인간이 희구하는 심성까지 차경

별서란 문인들이 세속을 피하여 전원생활을 즐기던 터전으로서 산천이 아름답고 주위환경이 조용한 곳을 찾아 저택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서 농사도 짓고 정원도 가꾸면서 은일과 은둔을 하면서 자연에 귀의하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쇄원의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애양단과 대봉대를 중심으로 한 전원과 광풍각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으로 되어 있다.

계류의 다리를 건너면 내원으로 직접 들어가는 길과 마을로 접어드는 길, 즉 마을과 별서정원을 구부할 수 있는 담장인 애양단과 계원은 오곡문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 부터 너럭바위와 오곡암 폭포 혹은 십장 폭호 그리고 오곡문옆의 오암과 연결되어 자연지형의 높이에 다라 담장을 쳐 소쇄원의 구획을 지어 놓았는데 이 정원의 주 건물인 제월당에서 보았을 때는 하나의 영역을 표시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주변의 경관을 차경할 수 있는 높이로 조성되어 있다.

진입공간에 대봉대나 그 주위 심어진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의미하는 태평성대의 희구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또 내원구역은 작정자가 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인 주돈이를 흠모하여 제월당과 광풍각으로 당호를 가진 건물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현판으로부터 군자로서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조영자의 의지까지도 나타내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의 상징 혹은 시정화의에서 오는 의경 혹은 심리적으로 사물을 통한 인식적인 차경이라고 할 수 있다.

광풍각은 중앙에 비록 한 칸의 방으로 되어있지만 분합문을 들어 올리면 열린 공간을 만들어 모든 자연에 몰아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으며 자연 속에 이용자도 자연과 함께 함몰되어지도록 조성되었다. 광풍각에서는 계류의 물 흐르는 소리와 반대 족 계안에 설치된 수차(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의 약동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가 있다.

 

2. 루와 정자 - 허의 개념으로 다양한 차경 기법을 구사

정자는 개방된 공간을 갖도록 만들어져 허창한 느낌을 주는 곳이라 하였다. 정자는 방이 없는 것도 많은데, 방이 없다는 것은 방을 만들어 주는 벽체가 없다는 것으로 벽체가 없음으로 인해 외부의 경관을 정자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또는 경관을 누정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이 가능하다. 방이 있는 정자들도 날씨가 무더울 때에는 분합문이라는 정치를 통해 문을 들어 올려 허한 공간을 만들어 경관을 끌어들이는 읍경의 처리됨을 볼 수 있다. 정자에 오르면 주위에 둘러싸혀 있는 자연경관(환경), 즉 주위의 다경을 볼 수 있으며 정자의 구조체인 기둥과 기둥사이를 통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장경도 관찰되어진다.

 

3. 서원-자연을 수기의 목적으로 이용

옥산서원은 서북의 도덕산이 주산, 북의 안태봉이 그 보조산, 동의 어래산(화개산)이 청룡, 서의 자옥산이 백호, 남의 무릉산(무학산)이 안산으로 구성된 4개의 명산이 에워싼 명당에 자리잡고 있고 세심대, 관어대, 영귀대, 탁영대, 징심대, 5대로 불리는 반석이 계곡을 구미고 있는 45대의 경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독락당은 회재의 은거생활을 위한 곳이므로 원경에서는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계정은 독락당과 접하고 있으며 자연환경과도 접하고 있는 비일상적 생활의 장소가 되는데 창문을 열면 자연의 경치가 바라보이고 게정에서는 자연환경에 개방되어 항상 자연의 풍경이 바라보여 차경할 수 있으며 오대에서는 자연 속에 있게 된다.

 

V.결론

우리나라의 도시, 마을이나 주택, 사찰과 사원등은 주변 자연환경인 산수에 순응, 조화되게 입지하여 인공적으로 조성되어지는 공간에서 주변 자연환경이 차경되게 배치되었다. 입지로 보면 배산임수하여 단면적으론 향천성을 갖고 있으며 건축물의 정면성이 주변 자연인 산과 상대하여 자연에 순응하도록 차경하는 자세로 앉혀졌다.

궁궐이나 주택 그리고 서원이나 사찰 등과 승경지에는 루정이 있어 그 위치만으로도 자연과 조화되는 경관을 조성하고 있으며 그 건축물에서 주변환경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체인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여지는 경관이나 구조체인 분합문을 들어올려 건축물의 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변의 모든 경관과 하나의 일체를 이루도록 조성하였다.

정원의 구성요소인 담장을 넘어 혹은 담장에 살창을 만들어 내부적인 공간에서 외부의 자연환경을 끌어드리며, 보여지는 것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변화 그리고 소리까지도 자연을 느끼게 조성하였다. 또 그 건축물에서 지난 시간에 일어났던 자연 및 인공환경에 대한 삶의 경험을 모아 경으로 읊어놓아 과거의 흔적까지도 차경에 내포하고자 하였다. 또 건축적인 요소의 현판이나 식재를 하여 엣 선인들의 흔적까지도 상징적 혹인 인식적으로 차경하고자 했으며, 정원적인 요소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글월을 써 넣어 상상적으로도 차경의 정원을 꾸몄다.

 

홍유릉

발자국찍기/왕릉 2011. 10. 19. 20:29 posted by 맑은눈동자
홍유릉은 고종과 순종이 모셔져있는 곳으로서 대한제국의 제1대, 2대 황제의 능이기에 여타 능과는 다른 형식으로 조성되어있습니다. 기본 능제의 설명은 건너뛰고 홍유릉이 다른 곳과의 차이점에 대하여 간략히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삼문
 들어가는 입구는 평삼문의 형태로 다른 어떤 능 입구에도 조성되어있지 않은 형태입니다.




2. 원지원도
조선왕릉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지당의 기본틀은 방지방도이며 간혹 방지방도를 볼 수는 있으나 원지원도는 쉽게 볼 수 있는 형태는 아닙니다.



3. 독일가문비 나무
아까시, 리기다소나무등의 사방목적으로 식재된 외래수목들을 점차 수종갱신사업등을 통하여 전통수목으로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중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는 독일가문비나무가 꽤 심어져있습니다.
독일가문비 나무는 정원수로 많이 심는 나무이지만 그 형태가 축쳐지고 음습한 기분을 들게 하여 역동적이며 진취적인 기상을 엿볼 수 있는 소나무와 비교했을때 왠지 왕릉에는 맞지 않네요.



4. 어재실 등의 기와무늬
예로부터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모셔진 어재실의 기와에는 용무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 홍릉 좌측편의 지당
이것은 해설사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하는 곳인데 실제 교수들 사이에서도 아직도 의미나 기능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라고 하네요. 두번의 해설을 들었을때 한분의 해설자가 이곳에 나무가 심어져있었으나 베어내고 없다라고 설명했는데 자료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는 하단에 잡초만 있을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지당의 역할을 한다면 입수구와 배수구가 있어야 할텐데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다듬돌바른층쌓기로 잘 정비된 모습입니다.


6. 침전
기본적으로 홍릉과 유릉은 정자각을 대신하여 황제의 격에 맞는 침전형태로 조성되어있다는 것은 아마 쉽게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요.


7. 유릉
망국의 한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유릉의 조성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정자각(침전)-봉분은 일자로 조성되어있어야 합니다. 간혹 홍살문을 지나 참도가 ㄱ자형태로 꺽인 형태로 조성된 경우는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정자각(침전) 정면에 서면 봉분은 건물에 가려 볼 수 없는 위치이지요 . 그나마 참도가 ㄱ자로 꺽여져 있는 정릉의 경우 계모를 미워했던 태종이 고의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유릉은 오히려 봉분이 좌측으로 삐죽이 나와 일자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릉은 일제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조선백성의 회유책으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주긴했지만 봉분-침전-홍살문의 위치조차도 제대로 만들지않아 고의성을 다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봉분의 위치가 좋은 혈자리라 할지라도 침전이나 홍살문의 위치나 각도만 조금 옮기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유릉의 희롱적인 요소는 한가지가 더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아래의 두 사진은 각각 홍릉과 유릉의 석물의 모습입니다. 사진을 보기전에 한마디 언급하자면 홍릉의 석물은 우리의 장인이, 유릉의 석물은 일본인 석공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홍릉의 석물>


<유릉의 석물>

한눈에 드러나는 차이점은, 각 석물의 다리 사이를 막아놓았느냐 아니면 뚫어놓았느냐일 것인데 예를 숭상한 이들에게 유릉의 석물은 굉장히 천하게 보였다지요. 

그 이유는 위의 사진처럼 말이나 그외의 동물의 음부까지 자세히 만들어 놓은 까닭입니다. 좋게말한다면 '사실적으로 조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다른 능에 조성된 봉분옆 석양의 뒷모습에도 음부가 조각된 것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두 곳의 석물을 비교해 본다면 묘한 다른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해설사의 설명은 아니며 본인이 사진을 보다가 느낀것으로 지극히 주관적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홍릉의 석물은 망주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형태로 조각이 된 반면, 유릉의 석물은 고개를 빳빳히 들어 확실히 불경스럽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8. 문무인석
홍릉과 유릉의 문무인석은 다른 능에 조성된 것과는 확실히 다른, 보다 사실적으로 조각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의 손으로 조각되었다는 유릉쪽의 문무인석이 보다 더 사실적이죠.

<홍릉의 문무인석>


<유릉의 문무인석>


<홍릉의 문인석 정면>


<홍릉의 무인석 정면>


<유릉의 문인석 정면>


<유릉의 무인석 정면>

조선 27대왕 중 유릉이전의 어느 문무인석도 유릉만큼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처음 본 느낌은 '참 잘 만들었다.'라는 생각이었으나, 보면 볼수록 사실적인 것이 곧 잘 만든 것은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게됩니다.
우리의 석공은 저런 사실적인 표현을 할 실력이 없었을까요? 그렇기보다 저렇게 표현한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된 것은 아닐런지. 

이는 때론 과장되며 해학적인 모습을 가진 얼굴이 역시 우리 전통적인 사고에 좀 더 잘 맞는 것이라는 머릿속의 결론을 내리게합니다. 









<보너스>
아래의 사진은 유릉아래쪽에 있는 조경요소입니다. 아래사진은 우물로 보이는데 위쪽사진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추후에 알아내고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심곡서원

발자국찍기/서원 2010. 5. 31. 21:18 posted by 맑은눈동자
민가나 별서를 제외하고 궁궐이나 왕릉, 사찰 및 서원등은 조영시 일정한 특징과 형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성리학적 규범이 엄격히 적용된 서원은 전학후묘냐 전묘후학이냐 혹은 전당후재냐 전재후당이냐 하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배치도는 모두 비슷하기에 집에서 가까운 용인의 심곡서원을 찾기로 결정.

심곡서원은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영수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 희생을 당한 정암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창건과 동시에 심수경 등의 상소로 '심곡'이라는 사액을 받은 곳입니다.
용인은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곳에 조광조를 배향하기 위한 서원건립의 논의가 있었으나 재력이 부족하여 인근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를 제향한 충렬서원에 임시로 배향되었다가 묘소 아래로 서원이 건립되면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고 하네요.

심곡서원(深谷書院)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12
-규모: 주요 7동
-주향자: 조광조(1482~1519)
-조성연대: 건립 및 사액 :효종 1년(1650)

대부분의 서원의 입지가 그렇듯이 심곡서원 역시 평지가 아닌 구릉지에 입지하여 지형적 위계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외삼문을 열어놓고 강당에 앉아 전면을 바라보면 아래쪽에 탁트인 들판이 보였을거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단지 상상으로 그칠뿐 현실은 다릅니다. 오히려 이곳을 찾은 후 크게 세가지 이유로 실망을 하였는데 밑에 천천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홍살문으로부터 외삼문앞에 이르러 사진을 찍었습니다. 솟을삼대문이 있으며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오른쪽문의 반만 개방해 놓았습니다. 약1시간정도 여기저기 자세히 둘러보았는데 그동안 방문하는 사람은 5명남짓되었습니다.

동재와 서재.
홍광표선생의 한국의 전통조경에서는 『조선 후기에 강학적 기능보다 제향적 기능이 더욱 강조되면서 재실의 의미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서원과 달리 재실공간이 생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라고 설명되어있으나 실제 답사해보니 동재, 서재가 모두 존재하였습니다. 새로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면 홍광표선생이 틀린 것이고, 홍광표선생의 설명이 맞다면 잘못된 복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재의 동쪽으로 있는 저 나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아시는 분 답 좀 부탁합니다.

외삼문을 들어서서 정면으로 보이는 일소당. 강당입니다.
심곡서원은 서원의 대부분의 형태인 전당후묘, 전재후당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면이 벽체로 막혀있고 전후좌우로 판문을 둔 건물로 온돌방이 없이 온통 마루로 되어있어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른 특이한 건축형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 궁금한 점은 예전 우리전통조경에서는 잔디가 능침말고는 쓰이지 않았는데 강학공간에 잔디는 어떤이유일까요?

일소당을 왼쪽으로 돌아 내삼문이 보입니다. 사당을 둘러싼 담장의 아랫부분은 장대석을 기초로 하여 과거의 이 서원이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담장 하단에 배수용 석루조는 서원에서 흔치 않은 점경물입니다.

심곡서원의 현판은 사액을 내려준 효종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합니다.

사당내부의 모습입니다. 일요일에 방문해서 개방을 하지 않은 건지, 아님 평상시에도 개방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이 잠겨있었습니다. 다행히 옆쪽에 담이 낮아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일소당의 초석은 자연석인데에 비해 사당은 다듬돌로 초석을 두었습니다.

일소당의 자연석 초석

강당 뒤 남쪽에는 장서각을, 북쪽으로는 고직사를 두고 있습니다.

사당 뒷편의 모습입니다.  전통조경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경사지를 단으로 처리하였으나 제향공간이므로 알록달록 예쁘게 꾸미지는 않았습니다. 단위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서 있습니다. 그 주위로 풀들이 많이 자라났는데 좀 정리를 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 하단에 우수의 배수로가 있습니다.
이러한 배수로를 통하여 우수는 결국 사원 남쪽의 방지로 흘러 들어옵니다.

전형적 방지원도가 있는데 자연석으로 쌓은 호안은 최근에 처리하였다 합니다. 끊임없이 계류가 유입되고 배수되지 않은 고요있는 방지이다 보니 깨끗한 느낌이 들지는 않더군요.

방지 동쪽으로 수령 5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와 한 그루의 향나무가 있어 휴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적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심곡서원을 둘러보면서 느낀 실망감 세가지를 적어보겠습니다.

#1. 주차장과 서원의 입지성등 주위환경
관리상의 한계겠지만 홍살문과 외삼문 사이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홍살문은 그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일요일이라 근처의 교회에 왔던 사람들의 주차로 인해 주차장은 매우 혼잡했습니다. 비워놓느니 지역주민의 편의를 위해 주차장을 개방하는 것은 좋은 취지이겠지만 홍살문을 넘으면서부터 서원에 진입했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복잡한 것보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좀 더 어울렸을겁니다.

문화재를 현대사회에서로부터 분리하여 문화재만을 즐길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 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서원이 아파트숲에 둘러쌓여버렸습니다. 옛 선인들이 즐겼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판이하게 틀려져 버렸으며 어느 곳 하나 정심의 장은 없어보였습니다.

#2. 문화재 관리소홀.
전날 창덕궁 후원을 관람한 후 이곳에 답사를 했기에 비교가 되서인지 심곡서원의 외형은 서원이란 곳을 처음 방문했던 저에게는 초라함 그 자체였습니다.
원래 심곡서원이 여타의 유명한 서원에 비해 작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규모의 크고작음 뿐만 아니라 현재 관리가 잘 되고 있느냐 아니냐는 점이지요.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놓여져있는 집기류등이 눈에 띄였고 전체적으로 보수가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3. 관리자의 관리소홀.
2번의 언급이 문화재청 제도하에서의 예산 및 관리상 문제라면 3번은 심곡서원내 관리자의 관리문제입니다. 위 사진은 사당뒷편 한 구석을 촬영한 것입니다.
 어이없게도 상추등의 채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거기 푯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더군요.
『농작물을 주인 허락없이 뜯어가는 일을 하지 마시요. 입장바꿔 생각해봐.』
이 푯말의 내용, 반말의 어투등으로 미루어보아 하루이틀 채소를 키운게 아닌거라는 느낌입니다. 그간 얼마나 방문객이나 주위 주민들이 무단채취해갔으면 저런 문구를 써놨겠습니까.
하지만 이곳은 사유지가 아니고 문화재 지역임을 다름아닌 문화재관리자가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원은 성리학적 규범이 엄격히 적용된 곳입니다. 심곡서원은 특히 중종재위시 사림파의 거두 조광조를 주향한 곳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큰 곳입니다.
작은 곳에서나마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여서 추후에 방문하는 사람에게나마 제가 느꼈던 불편한 점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