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세 국가 즉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는 문화 발전의 초기 시기이었으므로 자기 문화의 토대가 약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문화교섭에 있어서 그 이후 시기보다도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조경분야 중에서 특히 궁궐의 연못인 원지는 연못이 고대로부터 조경공간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관점과 사서에 남아있는 기록을 어느 정도 찾아 볼 수 있고 발굴되었거나 발굴 중인 원지 유적이 상당수에 달하다는 점에서 고대 원지의 비교연구가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며 또한 비교연구가 가능하여 교섭에 의한 한국, 중국, 일본 삼국의 원지의 입지와 기능의 공통점 즉 보편성과 삼국 특유의 특수성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원지의 입지와 기능에서 보이는 삼국의 공통성과 특수성을 고찰해 보려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원지 입지 및 기능 비교
1. 중국
1) 진,한
진시황은 상림원에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전설 속에 동해에 있다는 선도를 상징하는 봉래를 축조하여 인간세계의 선경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것이 중국 원림사상 최초로 원림중에 바다 신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 된다. 진시황은 자신을 가리켜 천자라 하였으므로 천상의 배치를 인간 세상에 나타내려고 한 의도가 이와 같은 신선의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무제는 태초 원년(B.C104)에 상림원내에 규모가 큰 웅대한 궁전인 건장궁을 축조하였다. 건장궁은 한 장안성의 서쪽에 있는 이궁으로 북쪽에는 태액지가 있다. 이 태액지는 못 가운데에 봉래, 영주, 방장을 상징하는 해중도를 축조하였다. 호수 가운데에 섬을 축조하여 해상 신선을 상징하는 수법은 진대에 이미 시작하였지만 완전한 형태의 삼신산을 축조하고 명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이후로 일지삼산의 전통적 배치형식은 역대로 전해져 청대의 화원, 원명원등 황가원림 배치형식의 기본이 되었다. 건장궁에는 태액지가 있고 이것은 수, 임지, 당중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미영궁에는 창지, 영아지, 임지가 있다.
2) 수, 당
수문제는 대흥성에 대흥원을 조성하였고, 곧 이어 수양제는 동도 낙양에 서원을 조성하였다. 서원은 인공산수를 위주로 한 원이다. 원내에 호수에는 진대로부터 내려오던 축조방식을 본받아 봉래, 방장, 영주의 3개 섬을 축조하였다.
당 장안성의 북쪽에는 위수가 있고 동쪽은 파와 산의 두 하천에 의지하고 있어 운수와 지단형성에 상당히 유리하였다. 성내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남부구역은 기복이 있다. 금원의 동쪽 대명궁에 있는 태액지는 연못 가운데 신선사상을 나타내는 봉래산이 있어서 봉래지라고 일컫는다.
2. 일본
1)비조
기록에 보이는 일본에 있어서 작정의 시초는 추고천황20년(612)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이 산악지형을 잘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하여, 황거의 남정에 수미산과 오교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사람들은 노자공이라고 부른다한다.
일본서기 추고천황 34년조에 소아마자는 저택에 중도를 가진 지정을 만들어 오대신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곳이 도장유적정원유구로서 백제인 후손이면서 세력가이었던 소아마자의 저택을 천무천황의 아들인 초벽황자의 궁(오궁)으로 사용한 곳이며, 일본의 현존 최고가집인 만엽집의 낭만과 일본 고대정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기능도 향연 및 위락장소인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비조명일향촌에서 발굴된 귀형석의 유수적은 주선석 유적과 연결된 것으로 향연의 장, 연의 장,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장이었다고 생각된다.
2)나라
원지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완경사지의 가장 자리에 위치하고 소규모의 곡지형을 이용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동과 남은 평성궁의 외곽을 구획하는 정지(整地)대원(大垣)에 면하고, 북과 남은 굴립주에 폐쇄된 면적 약 6600~7000㎡의 구획 내에 위치한다.
3)평안전기
평안시대의 정원 가운데 가장 저명한 신천원은 대침전의 남에 인접하고 또 동은 대궁, 서는 임생, 북은 이조, 남은 삼조에 이르는 부지에 있다. 즉 남북 약 485m, 동서 역 242m에 해당한다. 그 중앙에 중도가 있는 대지가 있고 지에 남면해서 정전인 건임각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각이 있고 또 거기에서 도랑이 남쪽으로 뻗은 조전이 있다. 이곳은 천황과 유족의 유연의 장소로 많이 사용하였고 차아천황이 홍인 3년(812) 2월, 여기에서 개최한 관화의 연의 기록은 평안경에 있어서 화견의 선구가 되었다.(일본후기)
현재의 대택지는 차아원 원지를 인계한 것이며 현재의 대각사 경내의 동에 면적 3000㎡의에 달한다. 지의 북쪽에 동서로 국도, 천신도 2도와 그 사이에 정호석의 입석이 있다. 지의 북방 약10m의 곳에 명고회롱적과 함께 1923년 국가 문화재로 명승에 지정되었다.
3. 한국
1)고구려
1973년 발간된 대성산성의 고구려 유적보고서에 의하면 대성산성에는 170개의 못이 있었던 사실과 그 분포상태를 밝혔고 그 중 8개의 못자리를 발굴하였고 9개의 못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못의 형태는 정방형, 장방형, 3각형, 둥근 형이다.
안학궁 토성 안의 38만㎡의 며적을 전부 조사한 결과 안학궁터의 궁전건축유적의 구성이 5개 부분으로 되어 있고 안학궁터 안의 정원터는 남궁 제1호 궁전의 서쪽과 제3호 궁전 주변에는 기묘한 바윗돌들이 서있고 제3호 궁전 앞뒤에는 물이 고이는 못자리가 있다. 동궁의 못자리에서 가장 큰 것은 성의 동쪽 벽과 남쪽 벽에 사귀는 모서리 부분에 있는 것이다. 이밖에 동궁 구역안과 남궁, 북궁등에 여러개의 못자리가 있는데 모두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 동궁의 북쪽 성벽 밖으로 꽤 큰 못자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미 많이 변하여 원래의 모양을 알 수 없다. 왕궁 안의 못은 왕의 놀이터로 뱃놀이, 술놀이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2)백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7년(391) 정월의 기록을 보면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다 하였다.
동성왕22년(500)봄에 궁성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그 누의 높이가 5장이나 되고 원지를 파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다하였다.
삼국사기 무왕 35년(634)기록을 보면 궁남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에서 끌어들였으며 못의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무왕 37년(636) 8월에 망해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또 무왕 39년(638) 춘삼월에 왕이 비빈들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의자왕 15년(655)에는 2월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립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방장선산은 삼신산의 하나로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연못에 삼신산을 조성한 기록으로 보이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이 대지를 방지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망해정의 건물의 명칭에서 이 못을 바다로 상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궁남지는 원래 약 3만평정도 규모이던 것이 1965-1967년 사이에 현재 규모인 약 13,000평으로 축소, 복원된 것으로 되어 있다.
3)신라
안압지는 신라시대 경주에 궁성인 월지의 정궁에서 조금 떨어진 동궁에 조성된 원지이다. 안압지에 관한 현재까지 조사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생각되는 것은 삼국사기 문무왕14년(674)로서 못을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것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12봉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 터가 있는데...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경덕왕 19년 2월에는 궁중에 대지를 팠다는 것이다.
발굴결과 확인된 못 속의 세 섬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의한 봉래, 방장, 영주로 볼 수 있다.
신라때는 안압지를 월지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가 당시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지 아니면 이미 있었던 못을 이용하여 다시 어떤 목적에 따라 재조성한 것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어 발굴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현재의 모습대로 안압지가 조성되기 이전에 이미 못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일부 밝혀졌다. 즉 서안의 호안석축 축조방법을 알기위해 단면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존의 석축 뒷편으로 그 이전에 있었던 또 다른 개흙의 흔적을 일부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보아 현존의 석축은 이미 있었던 못을 이용해서 대대적으로 재 조성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으나 완전한 규모를 아기 위해서는 지금의 석축을 제거하고 조사를 해야 가능하므로 중지했다.
4)발해
상경용천부 궁성의 동쪽구역에는 궁중정원이 있었는데 이곳 어화원유지 정원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곳에 있는데 북쪽에는 담벽으로 막은 여러개의 안뜰이 있으며 그 남쪽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북쪽과 동서로 각각 4곳의 조산이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어화원유지는 발해 귀족들이 놀며 즐기던 장소이다.
결론
동북아 삼국의 고대에 있어서 도성의 발달은 궁궐의 발달과 함께 했고 궁궐이 발달함에 따라서 거기에 부속하는 많은 원이 성립되고 특히 이궁을 중심으로 각종 원에는 원의 중심이 되는 많은 원지들이 조성되었다.
한, 중, 일 고대 원지에 있어서 중국의 원지는 삼신산이 특색인 일지삼산을 형성하고 있고, 일본의 원지는 발굴에 의해 그 정확한 입지, 규모, 형태등이 확인되었고 한국의 경우 고구려의 원지는 발굴되어 확인할 수 있으나 백제의 궁남지는 아직 일부 발굴된 상태이며 통일신라의 안압지는 발굴에 의해 입지, 규모, 형태들이 확인되었고 용강동 원지는 부분 발굴되었다.
한·중·일 고대 원지의 비교연구에 의하면 원지의 입지의 경우 중국의 당의 대명궁 봉래지, 일본 나라의 동원원지와 신라의 안압지, 발해의 어화원 지에서처럼 공통적으로 정궁의 동쪽에 조성되며 이것은 중국의 당 대명궁이 금원의 동쪽에 입지했던 영향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양기가 가장 강한 곳으로 원지의 입지도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공간이 형성하는 쾌락적인 분위기에 의해서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원지는 그 기능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궁중의 유연소로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중·일 고대원지는 공통적으로 정궁의 동쪽인 이궁에 입지하여 그 기능에 있어서 궁중의 유연소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원지 입지 및 기능 비교
1. 중국
1) 진,한
진시황은 상림원에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 전설 속에 동해에 있다는 선도를 상징하는 봉래를 축조하여 인간세계의 선경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것이 중국 원림사상 최초로 원림중에 바다 신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 된다. 진시황은 자신을 가리켜 천자라 하였으므로 천상의 배치를 인간 세상에 나타내려고 한 의도가 이와 같은 신선의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무제는 태초 원년(B.C104)에 상림원내에 규모가 큰 웅대한 궁전인 건장궁을 축조하였다. 건장궁은 한 장안성의 서쪽에 있는 이궁으로 북쪽에는 태액지가 있다. 이 태액지는 못 가운데에 봉래, 영주, 방장을 상징하는 해중도를 축조하였다. 호수 가운데에 섬을 축조하여 해상 신선을 상징하는 수법은 진대에 이미 시작하였지만 완전한 형태의 삼신산을 축조하고 명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이후로 일지삼산의 전통적 배치형식은 역대로 전해져 청대의 화원, 원명원등 황가원림 배치형식의 기본이 되었다. 건장궁에는 태액지가 있고 이것은 수, 임지, 당중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미영궁에는 창지, 영아지, 임지가 있다.
2) 수, 당
수문제는 대흥성에 대흥원을 조성하였고, 곧 이어 수양제는 동도 낙양에 서원을 조성하였다. 서원은 인공산수를 위주로 한 원이다. 원내에 호수에는 진대로부터 내려오던 축조방식을 본받아 봉래, 방장, 영주의 3개 섬을 축조하였다.
당 장안성의 북쪽에는 위수가 있고 동쪽은 파와 산의 두 하천에 의지하고 있어 운수와 지단형성에 상당히 유리하였다. 성내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으며, 남부구역은 기복이 있다. 금원의 동쪽 대명궁에 있는 태액지는 연못 가운데 신선사상을 나타내는 봉래산이 있어서 봉래지라고 일컫는다.
2. 일본
1)비조
기록에 보이는 일본에 있어서 작정의 시초는 추고천황20년(612)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에서 도래한 사람이 산악지형을 잘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하여, 황거의 남정에 수미산과 오교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사람들은 노자공이라고 부른다한다.
일본서기 추고천황 34년조에 소아마자는 저택에 중도를 가진 지정을 만들어 오대신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곳이 도장유적정원유구로서 백제인 후손이면서 세력가이었던 소아마자의 저택을 천무천황의 아들인 초벽황자의 궁(오궁)으로 사용한 곳이며, 일본의 현존 최고가집인 만엽집의 낭만과 일본 고대정쟁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기능도 향연 및 위락장소인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비조명일향촌에서 발굴된 귀형석의 유수적은 주선석 유적과 연결된 것으로 향연의 장, 연의 장, 외국사절을 접대하는 장이었다고 생각된다.
2)나라
원지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완경사지의 가장 자리에 위치하고 소규모의 곡지형을 이용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동과 남은 평성궁의 외곽을 구획하는 정지(整地)대원(大垣)에 면하고, 북과 남은 굴립주에 폐쇄된 면적 약 6600~7000㎡의 구획 내에 위치한다.
3)평안전기
평안시대의 정원 가운데 가장 저명한 신천원은 대침전의 남에 인접하고 또 동은 대궁, 서는 임생, 북은 이조, 남은 삼조에 이르는 부지에 있다. 즉 남북 약 485m, 동서 역 242m에 해당한다. 그 중앙에 중도가 있는 대지가 있고 지에 남면해서 정전인 건임각이 세워져 있고, 좌우에 각이 있고 또 거기에서 도랑이 남쪽으로 뻗은 조전이 있다. 이곳은 천황과 유족의 유연의 장소로 많이 사용하였고 차아천황이 홍인 3년(812) 2월, 여기에서 개최한 관화의 연의 기록은 평안경에 있어서 화견의 선구가 되었다.(일본후기)
현재의 대택지는 차아원 원지를 인계한 것이며 현재의 대각사 경내의 동에 면적 3000㎡의에 달한다. 지의 북쪽에 동서로 국도, 천신도 2도와 그 사이에 정호석의 입석이 있다. 지의 북방 약10m의 곳에 명고회롱적과 함께 1923년 국가 문화재로 명승에 지정되었다.
3. 한국
1)고구려
1973년 발간된 대성산성의 고구려 유적보고서에 의하면 대성산성에는 170개의 못이 있었던 사실과 그 분포상태를 밝혔고 그 중 8개의 못자리를 발굴하였고 9개의 못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못의 형태는 정방형, 장방형, 3각형, 둥근 형이다.
안학궁 토성 안의 38만㎡의 며적을 전부 조사한 결과 안학궁터의 궁전건축유적의 구성이 5개 부분으로 되어 있고 안학궁터 안의 정원터는 남궁 제1호 궁전의 서쪽과 제3호 궁전 주변에는 기묘한 바윗돌들이 서있고 제3호 궁전 앞뒤에는 물이 고이는 못자리가 있다. 동궁의 못자리에서 가장 큰 것은 성의 동쪽 벽과 남쪽 벽에 사귀는 모서리 부분에 있는 것이다. 이밖에 동궁 구역안과 남궁, 북궁등에 여러개의 못자리가 있는데 모두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 동궁의 북쪽 성벽 밖으로 꽤 큰 못자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이미 많이 변하여 원래의 모양을 알 수 없다. 왕궁 안의 못은 왕의 놀이터로 뱃놀이, 술놀이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2)백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7년(391) 정월의 기록을 보면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다 하였다.
동성왕22년(500)봄에 궁성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그 누의 높이가 5장이나 되고 원지를 파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다하였다.
삼국사기 무왕 35년(634)기록을 보면 궁남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에서 끌어들였으며 못의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무왕 37년(636) 8월에 망해누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고 또 무왕 39년(638) 춘삼월에 왕이 비빈들과 함께 대지에서 배를 띄우고 놀았다. 의자왕 15년(655)에는 2월에 태자궁을 지극히 화려하게 수리하고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립하였다.
위의 기록에서 방장선산은 삼신산의 하나로서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연못에 삼신산을 조성한 기록으로 보이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이 대지를 방지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 망해정의 건물의 명칭에서 이 못을 바다로 상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궁남지는 원래 약 3만평정도 규모이던 것이 1965-1967년 사이에 현재 규모인 약 13,000평으로 축소, 복원된 것으로 되어 있다.
3)신라
안압지는 신라시대 경주에 궁성인 월지의 정궁에서 조금 떨어진 동궁에 조성된 원지이다. 안압지에 관한 현재까지 조사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생각되는 것은 삼국사기 문무왕14년(674)로서 못을파고 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것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는 천주사 북쪽에 있다. 문무왕이 궁내에 못을 만들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어 무산12봉을 상징하고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를 길렀다. 그 서쪽에 임해전 터가 있는데...라고 기록되어있다. 또 삼국사기 경덕왕 19년 2월에는 궁중에 대지를 팠다는 것이다.
발굴결과 확인된 못 속의 세 섬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의한 봉래, 방장, 영주로 볼 수 있다.
신라때는 안압지를 월지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가 당시에 새롭게 조성된 것이지 아니면 이미 있었던 못을 이용하여 다시 어떤 목적에 따라 재조성한 것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어 발굴을 통해 조사해 본 결과 현재의 모습대로 안압지가 조성되기 이전에 이미 못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일부 밝혀졌다. 즉 서안의 호안석축 축조방법을 알기위해 단면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존의 석축 뒷편으로 그 이전에 있었던 또 다른 개흙의 흔적을 일부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보아 현존의 석축은 이미 있었던 못을 이용해서 대대적으로 재 조성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으나 완전한 규모를 아기 위해서는 지금의 석축을 제거하고 조사를 해야 가능하므로 중지했다.
4)발해
상경용천부 궁성의 동쪽구역에는 궁중정원이 있었는데 이곳 어화원유지 정원은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곳에 있는데 북쪽에는 담벽으로 막은 여러개의 안뜰이 있으며 그 남쪽에 큰 연못이 있다. 연못의 북쪽과 동서로 각각 4곳의 조산이 조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어화원유지는 발해 귀족들이 놀며 즐기던 장소이다.
결론
동북아 삼국의 고대에 있어서 도성의 발달은 궁궐의 발달과 함께 했고 궁궐이 발달함에 따라서 거기에 부속하는 많은 원이 성립되고 특히 이궁을 중심으로 각종 원에는 원의 중심이 되는 많은 원지들이 조성되었다.
한, 중, 일 고대 원지에 있어서 중국의 원지는 삼신산이 특색인 일지삼산을 형성하고 있고, 일본의 원지는 발굴에 의해 그 정확한 입지, 규모, 형태등이 확인되었고 한국의 경우 고구려의 원지는 발굴되어 확인할 수 있으나 백제의 궁남지는 아직 일부 발굴된 상태이며 통일신라의 안압지는 발굴에 의해 입지, 규모, 형태들이 확인되었고 용강동 원지는 부분 발굴되었다.
한·중·일 고대 원지의 비교연구에 의하면 원지의 입지의 경우 중국의 당의 대명궁 봉래지, 일본 나라의 동원원지와 신라의 안압지, 발해의 어화원 지에서처럼 공통적으로 정궁의 동쪽에 조성되며 이것은 중국의 당 대명궁이 금원의 동쪽에 입지했던 영향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양기가 가장 강한 곳으로 원지의 입지도 이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공간이 형성하는 쾌락적인 분위기에 의해서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 원지는 그 기능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궁중의 유연소로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중·일 고대원지는 공통적으로 정궁의 동쪽인 이궁에 입지하여 그 기능에 있어서 궁중의 유연소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